1. 한글을 접해 본 적이 없어요
3월, 초등학교 입학식. 중국어로만 이야기하는, 유난히 산만한 한 남자 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는 책상과 사물함에 적힌 자신의 한글 이름을 몰라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총명이(가명)의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중국인(조선족)으로 두 분은 시내 중심가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계셨다. 총명이에게는 우리 학교 유치원에 갓 입학한 5살 여동생도 있었는데, 아이들의 하교 시간에 맞추어 데리러 오지 못하거나 학교 안내장을 확인하지 못하는 일이 잦을 정도로 두 분은 몹시 바쁜 것 같았다. 한족 유치원을 다닌 데다 엄마와는 중국어로만 대화한다고 하니 총명이의 제1언어 혹은 모국어(mother tongue)는 중국어인 셈이었다. 한국어로는 기본적인 대화만 알아듣고 한글은 거의 접해 본 적이 없는 듯 했다. 중국인으로 자라온 아이가 한국학교에 입학했으니 앞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을까를 생각하니 벌써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입학 첫날, 총명이를 한글개별지도 대상자로 정하고 총명이 아버님께 매일 30분 일찍 등교시켜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자신의 이름 석 자는 익혀서 학교에 보내려고 했는데 일이 바빠 그렇게 못했다며 한글개별지도를 고마워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입학식 다음 날부터 매일 아침 30분씩 한글공부를 시작했다.
2. 총명이는 총명해요
총명이는 매사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씩씩하고 영리한 아이였다. 3월에는 유치원에서 하던 버릇대로, 친구들의 사소한 잘못을 꼬치꼬치 이르거나 교사가 자신의 활동과제를 대신 해주기를
바랐지만, 점차 초등학생답게 독립적이고 자율적이 되어갔다. 우리 학교에 입학한 이후, 놀이집단이 한국어 사용자들로 바뀌면서 한국어 의사소통 능력도 가파르게 발달했다. 미용업에
종사하시는 부모님을 닮아서인지, 눈썰미가 좋아 다양한 한글 자모의 모양도 빨리 익히고 비슷한 모양의 구분도 곧잘 해냈다.
국어 시간, 그림책을 처음 읽어주었을 때 총명이는 책의 내용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책장을 열면 예쁜 그림과 글이 펼쳐지는 책이라는 존재를 신기해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동안
총명이에게는 중국어로든 한국어로든 주의를 기울여 책을 읽어 주는 사람, 책을 통해 문자를 가르쳐 준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총명이는 그 누구보다도 귀를 기울여 교사가 읽어주는
그림책 이야기를 들었고, 중국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책과 비슷한 자신의 경험을 길게 늘어놓기도 했다. 이렇게 좋아하는 그림책을, 친구들처럼 스스로 자유롭게 읽고 싶은 마음이
총명이가 한글을 꾸준히 공부해 나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그림책을 좋아한 덕분인지, ‘여우누이’, ‘토끼’, ‘호랑이’ 등 그림책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은
총명이가 가장 빨리 습득한 단어들이 되었다.
3. 내 이름부터 시작해요
기계적으로 자모를 익히는 대신, ‘의미’와 ‘아이의 생활’을 중심에 두고 총명이의 이름부터 시작했다. 칠판에 총명이의 이름 세 글자를 써 놓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읽어주며 물었다.
“○-○-○, 누구 이름이지요?”
“내 이름.”
“몇 글자지요?”
“…….”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중국어로 다시 물었다.
“几个字?”
“三个字”
이름 세 자 중, 이중모음이 들어가는 성과, 받침이 들어가는 마지막 글자는 일단 제쳐두고, 가장 간단한 중간글자 ‘수’부터 시작했다.
‘스’ 소리를 내며 자석글자 ‘ㅅ’을 아래로 내리고 ‘우’하며 자석글자 ‘ㅜ’를 올려, ‘스~우, 수’하며 자음과 모음이 각자의 소리를 가지고 만나 한 소리를 만드는 것을 여러 번 보여주었다. 이때 자음자 그룹은 칠판 왼쪽에 순서대로 미리 붙여놓고, 모음자 그룹은 칠판 오른쪽에 붙여두어 자음과 모음을 확실히 구별하도록 했다. 이렇게 ‘수’의 모양과 소리, 결합 원리를 익힌 다음, ‘사’로 넘어갔다. ‘스~아, 사’라고 하니까 총명이가 ‘사자!’라고 말하여 ‘사자’라는 글자도 함께 익혔다. 처음 글자를 익힐 때는 1) 소리-모양-의미 결합 교사 시범, 2) 총명이가 소리 내며 글자 만들기, 3) 총명이가 소리 내며 글자 써 보기의 단계를 밟아, 교사 시범이나 입력 후에는 꼭 스스로 여러 번 반복하여 다지는 기회를 주었다. “한글 공부 처음 한 날, 세 글자나 익히다니 넌 정말 총명한 아이구나! 앞으로도 공부를 참 잘하겠는걸.”하면서 총명이를 한껏 칭찬해 주었다. 총명이의 눈이 자부심으로 반짝였다.
4. 수준평정 그림책을 읽어요
‘가’, ‘나’, ‘마’, ‘수’, ‘사자’ 다섯 글자를 익히고, 수준평정 그림책 0단계 ‘마트’부터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마트에 갔어요’의 ‘요’와 ‘파’를 새로 익혔다. ‘파’를 익혔음에도 ‘양파’ 속 ‘파’는 읽어내지 못하고 양파 그림을 보고 중국어 그대로 매번 ‘양총(洋葱)’이라고 하였다.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한국 아이들은 누구나 다 아는 ‘아이스크림’은 처음 듣는 단어인지 여러 번 반복해 읽었지만 단어가 길어 잘 익혀지지 않았다. 0단계 ‘마트’를 3일 동안 반복해 읽고 0단계의 다른 책 ‘얼굴’, ‘집’ 등을 순차적으로 도입하여 병행, 반복하여 읽었다. 그렇게 달팽이 걸음으로 한 뼘 한 뼘 3월부터 읽어 온 책이 6월이 되니 어느덧 3단계, 총 16권이 되었다. 1학년 아이들이 평균 6~7단계의 책을 혼자 읽어내는 것을 감안하면 총명이는 아직 갈 길이 멀다.
5. 받아쓰기로 다져요
국어시간이나 일상생활, 그림책 등 맥락 속에서 의미 있게 익힌 단어들은 받아쓰기를 반복하여 꼭 스스로 다지도록 했다. 처음 받아쓸 때는 ‘나, 느아, 나’하고 자모를 분절하여 교사가 힌트를 주었지만 차츰 ‘느, 아, 음, 남’ 하며 스스로 소리를 내어 쓰고, ‘ㄱ’, ‘ㅁ’, ‘ㄹ’, ‘ㅇ’등 쉬운 받침은 스스로 찾아내어 쓸 수 있게 되었다. 한글문해력지도 연수를 받을 때에는 수준평정 그림책 활용법과 실제적 메시지 쓰기 위주로 연수를 받았지만, 자모의 소리를 정확히 익히고 매일 반복, 확장하며 일견단어를 늘여나가는 데에는 받아쓰기가 참 효과적인 것 같다.
6. 총명이와 선생님, 함께 성장해요
4월, 남학생만 5명이던 우리 반에 예쁜 여학생 하나가 새로 입학했다. 이 여학생에게 각자 자기소개를 해보자고 했더니 총명이가 대뜸, “야, 나, 한글 잘 한다.”며 자신 있게 자기소개 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이제 총명이는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동생과 엄마, 아빠의 이름도 곧 잘 쓴다. 국어 교과서의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가요’와 시 ‘밤길’도 유창하게 잘 읽는다. 아직, 모국어인 중국어의 영향으로 /ㅓ/와 /ㅗ/를 듣고 잘 구분하지 못하는 점, /ㅛ/와 /ㅠ/ 등 한국어 발음이 분명치 않은 점, 일견단어 어휘의 부족, 겹받침 쓰기, 관용구나 의성의태어 이해, 그림일기 쓰기 등 총명이가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많지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총명이의 기적처럼 예쁘고 대견한 배움을 도와주고 싶다.
받아쓰기 하며 한 글자씩 다지기
실제적 메시지 쓰고 문장 조합하기
수준평정 그림책 읽기
남 혜 진 연변한국국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