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1일.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어렵게 마련된 학교 버스에 19명의 학생들과 언어학부장 잘리라 선생님과 함께 올라탔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버스에 시동을 걸자,
아이들이 전통에 따라 이슬람 기도를 시작했다.“비스밀라히라마니라힘......” 아이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나도 토픽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2017년에 처음 국제국립교육원의 교원해외파견사업으로 말레이시아 공립 중등학교 10개교에 한국어 교사가 파견된 지 벌써 5년이 되어간다. 그해 1월부터 나는 SGS라는 말레이시아
공립 여자기숙학교에서 Form 1(중학교 1학년) 무슬림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어 수업을 시작했다. 지난 5년 동안 SGS 한국어반 아이들은 나의 땀과 눈물, 사랑을 자양분으로 깜짝
놀랄 정도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숙녀들로 성장했다. 그리고 학생들 대부분이 한국어를 기반으로 한 자신만의 멋진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들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2020년에
토픽반을 개설하고 Form 4 학생 17명과 Form 3 학생 18명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특별 수업을 했다. 토픽반 학생들은 정규 수업이 끝난 후, 한국어
교실에 모여 앉아 더위와 피로를 쫓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토픽반 학생들의 모습 1
토픽반 학생들의 모습 2
하지만 2020년 초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2020년 3월 18일부터 말레이시아 전역에 이동통제령(Movement Control Order)이 내려졌다. 학교를
비롯한 모든 공공기관은 문을 닫았고, 거주지 10km 밖으로의 이동이 금지되었다. 언제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지, 토픽 시험을 볼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온라인으로 계속 토픽을 공부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세가 진정되고 학교에 돌아가 토픽 시험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루에 수백, 수천 명씩 쏟아지는 확진자 수를 보면서 실망으로 바뀌었다. 결국, 10월에 예정되었던 토픽 시험은 취소되었다.
그 후로도 코로나바이러스는 전 세계로 확산에 확산을 거듭했고 말레이시아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서도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잠시 학교로 돌아왔던 아이들은 10월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학교도 다시 문을 닫았다. 그렇게 12월에 계약이 종료된 나는 한국으로 귀국을 했고, 언제 말레이시아에 돌아갈 수 있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저 어서 다시 돌아가 나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행히 2021년 초부터 말레이시아의 확진자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교원해외파견사업이 재개되었다. 나는 2021년 3월 5일 말레이시아에 재입국하여 일주일간 격리한 후, 아이들이
기다리는 학교로 돌아왔다. 일 년을 기다렸던 말레이시아의 토픽 시험도 2021년 4월 11일로 확정되었다. 이제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아이들을 시험장에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한 말레이시아 정부의 거리두기지침(SOP)으로 인해 정원이 40명인 학교 버스에 탈 수 있는 아이들의 숫자는 19명뿐이었다.
열심히 준비한 아이들을 시험장에 다 데리고 갈 수 없으니 정말 난감하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토픽 시험의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선 대학 입시를 앞둔 Form 5는 17명
모두를 참가시키고 아직 시간이 있는 Form 4 중에서는 2명만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 아이들과 같이 힘차게 응원 구호를 외친 후, 학교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 학교에서 토픽 시험장인 UKM까지는 차로 약 30분 거리지만, 이동통제령으로 주(州)간
이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경찰 및 군인들이 검문을 했다. 시험장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서 시험을 보게 되는 학생들의 건강이 염려되었고,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검문소를 지나가면서는 괜히 긴장도 되었다.
토픽 시험 당일, 학교에서 응원 구호
토픽 시험 당일, 신원 확인하고 입장
시험장에 도착해보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보려고 줄을 서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 속에서도 정말 많은 말레이시아인들이 토픽 시험에 응시한 것을 보니 한국어의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실감할 수 있었다. 학생들을 시험장으로 들여보내고 나서야 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토픽 시험을 보는 일이 이렇게 무섭고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 되다니,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 사는 우리 아이들이 정말 안쓰럽고,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2021년 5월 20일. 토픽 시험의 결과가 나왔다. 19명의 학생들 중 16명은 2급을 받았고, 3명은 아깝게 1급을 받았다. 마스크를 쓰고 바이러스를 염려하면서 어렵게 치러낸
토픽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낸 아이들이 너무나 기특하고 감사했다.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는 몹쓸 바이러스와 끝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는 곧 물러날 것이고
우리도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2021년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의 위험 속에서도 한국어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눈빛은 내가 앞으로도 기쁘게 끊임없이 전진할 수 있도록
밝은 등불이 되어 줄 것이다.
이 수 현 Sekolah Menengah Sains Tuanku Aishah Rohani 한국어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