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교 현장 리포트・수업 사례

혼합연령·다언어 교실에서 만들어가는 초기적응 프로그램

“우리 아이가 한국어(영어)를 하나도 못하는데 괜찮을까요?”

3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필리핀한국국제학교유치원의 가장 어린 학급인 새싹반은 한국어, 영어, 타갈로그어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만 3세부터 만 5세까지의 유아들이 함께 생활합니다. 이곳은 아이들이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같은 만 4세라도 처음 입학한 유아는 새싹반에서, 이미 유치원 생활을 경험한 재원생은 열매반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새싹반은 전체 유아의 80% 이상이 신입생입니다. 또한, 필리핀에 소재한 재외한국학교의 특성상 주재원 발령, 이주 등으로 학기 중 중도 입학하는 유아의 비율도 높은 편입니다.

아이들의 출발선도 모두 다릅니다. 어떤 아이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익숙하고, 어떤 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나 처음으로 또래와 집단생활을 경험합니다.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도 있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접해 보지 못한 다문화 가정의 아이도 있습니다. 같은 교실에 있지만 언어도, 문화도, 생활 경험도, 발달 수준도 모두 다릅니다. 그만큼 학부모님들의 초기 우려도 큽니다. 한국에서 온 부모는 “낯선 나라에서 우리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요?”를 걱정하고, 필리핀 부모는 “한국어를 모르는데 유치원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요?”를 가장 궁금해합니다. 언어는 달라도 부모의 마음만큼은 모두 같습니다. 바로 ‘우리 아이가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실에서 저는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아이의 성장은 교사 혼자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안정적으로 적응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사만의 노력이 아니라, 유아와 또래, 학부모, 학교 구성원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교육공동체가 필요했습니다.

2월, 교사가 가장 먼저 하는 일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2월, 가장 먼저 한 일은 교실 꾸미기가 아닌 학부모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입학 전 초기 면담을 통해 아이가 이전에는 어떤 환경에서 생활했는지, 집에서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보호자와 분리될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실제로 영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한 유아는 새로운 한국어 환경에 대한 부담이 컸고, 또 다른 유아는 보호자와 떨어지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미리 알았기에 모든 아이에게 같은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특성에 맞는 적응 지원을 계획할 수 있었습니다.

유아의 첫걸음을 함께하는 EAP

EAP(Early Adaptation Program, 초기적응 프로그램)는 다언어·혼합연령 환경에서 유아가 새로운 교실과 공동체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새싹반 교사가 개발한 모델입니다. 유아의 정서적 안정과 일과 적응, 또래 관계 형성, 언어 지원, 가정과의 협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교사·학부모·또래·학교가 함께 유아의 첫걸음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EAP 구성 요소 주요 내용
정서적 안정 지원 단계적 등원, 교사의 안정적인 맞이, 유아가 선호하는 물건이나 활동을 활용한 교실 진입, 감각놀이와 미술활동을 통한 긴장 완화로 심리적 안정감 형성 지원
예측 가능한 일과 지원 그림과 사진을 활용한 시각적 일과표 제공, 반복적인 일과 안내, 전이 상황 사전 예고를 통해 하루의 흐름을 예측하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
언어반응적 지원 유아의 한국어·영어·몸짓·표정·단어 표현을 수용하고 한국어 또는 영어로 재진술하며, 언어지원 그림카드와 다양한 시각자료를 활용하여 의사소통 지원
또래 관계 지원 혼합연령 학급의 특성을 활용한 또래 버디 운영, 소집단 놀이 및 또래 모델링을 통해 놀이 참여와 또래 관계 형성 지원
가정-학교 연계 입학 전 초기 면담과 보호자 상담을 통해 유아의 적응 과정과 언어 사용, 가정에서의 변화를 공유하고, 가정과 유치원이 함께 성장 과정을 지원하는 협력체계 구축

새싹반에서는 등교 첫날부터 아이들의 활동 참여를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에게는 교실을 충분히 둘러볼 시간을 주었고, 애착 인형을 가져오는 것도 허용했습니다. 또한, 그림과 사진으로 구성한 시각적 일과표를 활용해 “이제 놀이를 하고, 간식을 먹은 뒤 엄마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야.”라고 반복해서 안내하며 하루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언어적 상호작용만큼이나 비언어적 상호작용이 중요합니다. 따뜻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고 “사랑해”, “잘했어”와 같은 긍정적인 언어를 자주 들려주었으며, 안아주기, 눈 맞춤, 미소, 토닥여 주기 등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비언어적 상호작용을 지속적으로 실천했습니다. 이러한 작은 상호작용은 아이들이 교사를 신뢰하고, 교실을 안전한 공간으로 인식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사의 세심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저는 매일 유아들의 등원 모습, 놀이 참여, 또래 관계, 정서 변화 등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그날의 변화와 지원 방안을 함께 분석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다음 날의 교육을 계획하는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보호자와의 분리에 큰 어려움을 보였던 한 유아는 입학 초기에는 한 시간 가까이 울며 교사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3주 차에는 스스로 시각적 일과표를 살펴보며 다음 활동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고, 4주 차에는 또래와 함께 짧은 놀이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유아의 작은 변화를 꾸준히 기록하고 그에 맞는 지원을 이어간 결과, 적응은 활동에 얼마나 많이 참여했는지가 아니라 아이가 교실을 안전한 공간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속도로 관계를 맺어 가는 과정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래와 함께 성장하는 배움 공동체

혼합연령 학급의 가장 큰 장점은 아이들이 서로의 든든한 지원자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재원생과 형님들은 신입 유아의 버디가 되어 교실을 안내하고, 놀이 규칙과 정리 방법을 자연스럽게 알려주었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또래를 관찰하고 따라 하며 교실 문화를 익혀 갔습니다. 실제로 혼자 놀이하는 시간이 많았던 한 유아는 버디 활동과 협동 놀이가 반복되면서 친구 옆에 앉아 같은 활동에 참여하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 자체가 또래 관계를 시작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또래 관계가 늘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언어 환경에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친구들끼리 놀이집단이 만들어지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3월에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또래와 먼저 친밀감을 형성하도록 돕고, 4월부터는 자리 배치, 협동 놀이, 소집단 활동, 그림카드와 역할놀이 등을 통해 다양한 언어 배경을 가진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설계했습니다.

무엇보다 교사는 놀이를 지켜보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 놀이 활동자이자 놀이 초대자가 되었습니다. 친구에게 놀이를 제안하는 방법, 차례를 기다리는 방법, 함께 이야기하는 방법을 직접 모델링하며 아이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새싹반의 하루는 우연이 아닌, 모든 아이가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교육과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새싹반 교실에서 일어나는 저마다 다른 배움

혼합연령 학급에서는 같은 활동이라도 발달 수준에 따라 서로 다른 배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수업을 설계했습니다. 어린 유아는 색칠과 붙이기를 중심으로 참여하도록, 중간 수준의 유아는 가위로 오려 구성하도록, 고연령 유아는 자신의 생각을 그림과 글, 이야기로 확장하여 표현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결과보다 과정 중심의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시도했는지, 친구와 함께 참여했는지를 더 가치 있게 바라보았으며, 교사는 활동 중 아이마다 다른 질문을 던지고 필요한 도움의 수준을 조절했습니다.

또래 역시 중요한 배움의 자원이었습니다. 또래 버디를 통해 발달이 빠른 아이는 친구를 돕고, 어린아이는 형님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새로운 기술을 익혔습니다. 혼합연령 수업은 더 많은 준비를 요구하지만, 아이들의 차이를 배움의 자원으로 바꾸어 주는 의미 있는 교육과정이었습니다.

함께 성장하는 교육의 의미

해외 한국학교의 교실에서는 언어보다 먼저 관계를 배우고, 수업보다 먼저 공동체를 경험합니다. 아이는 교사에게서 안정감을 얻고, 또래에게서 용기를 배우며, 가정에서는 배움을 이어 갑니다. 그리고 교사들은 서로의 전문성을 나누며 아이의 성장을 함께 설계합니다. 교육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한 아이를 중심으로 교사와 학부모, 또래와 학교가 연결될 때 비로소 아이는 자신의 속도로 성장합니다. 필리핀의 작은 교실에서 저는 오늘도 믿습니다. 좋은 교육은 좋은 공동체에서 시작되며, 아이는 함께 키울 때 가장 크게 자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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