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天津; 텐진) 지명의 유래
천진은 북경(北京; 베이징)과 인접해 있으며 중국 화북 지역에 위치한 직할시이다. 중국의 수도권으로 북경과 하북성(河北省)과 함께 경진기(京津冀; 징진지)로 분류된다.
천진의 이름은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천진의 번화가인 천진역(天津站) 근처의 아름다운 해하(海河; 하이허) 강변공원을 걷다 보면 큰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비석 앞면에는 ‘天子津渡’(천자진도; 천자가 나루를 건너다)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을 해석해보면 <명나라 건문 2년에 연왕 주체(燕王朱棣)가 이곳으로 말미암아 강을 건너 남경을 공격하여 정권을 뒤엎어 황제의 자리를 취하고 영락이라 연호를 바꾸고 천진이라는 이름을 내려 위(卫)를 설치하고 성을 쌓기 시작했다.> 라고 되어 있다.
삼촌이었던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기 위해 ‘정난의 변(靖難之變: 1399-1402년)’을 일으키는데, 건문제 주변의 간신을 제거하여 황제의 권위를 바로세운다는 명분이었다. 영락제는 북경에서부터 남경까지 긴 거리를 진격하기 위해 운하를 선택하였다. 천진이라는 이름은 천자가 이곳에서 강(운하)을 건넜다고 하여 ‘천자의 나루’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천진시 홍교구 해하(海河) 강변에 위치한 천자진도유지공원(天子津渡遗址公园)에 있는 비석. 비석의 앞면엔 <천자진도> 네 글자가, 뒷면에는 천진 지명의 유래가 설명되어 있다. (본인 촬영)
서울 출신 중국 종양의학의 창시자 김현택(金显宅) 교수님(1904-1990)
天津市河西区环湖西路(천진시 하서구 환호서로)에 위치한 天津市肿瘤医院(천진시 종양병원)을 지나가다 보면 병원입구 정면에 동상을 하나 볼 수 있다. 천진시 종양병원은 중국에서 가장 큰 종양예방치료 병원의 하나로, 규모가 큰 종양(암) 전문병원이다.
동상의 앞면에는 덕고의수(德高医粹, 덕은 높고 의학의 정수)라는 글이 쓰여 있다.
병원 정문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김현택 교수님의 동상 (본인 촬영)
동상의 주인공인 김현택 교수는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사립배제중학교 3학년 때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군의 진압으로 집으로 가까스로 돌아왔다. 김현택의 아버지는 15살의 김현택을 중국에 보내기로 결심하고 짐꾼에게 부탁해 중국 단동으로 보낸다. 그는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도움으로 김규식의 조카 김진성과 함께 하북에서 작은 병원을 운영하는 김현국을 찾아간다.
김현택은 호강대학교 의대 예과를 졸업한 뒤 1926년 우수한 성적으로 당시 최고의 교육수준을 갖춘 북경협화의학원에 합격하였다. 북경협화의학원은 1917년 미국 석유왕 록펠러재단이 기부하여 설립했고, 2006년에는 북경 칭화대학에 합병되었다. 독립운동가인 김산, 이용설도 1920년대 초에 여기서 공부를 했다. 김현택도 대학 3학년 때 조선 청년들이 중국에서 조선독립을 도모하는 조직에 참여했다. 김현택은 이곳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꿈을 키웠으며 진학을 위해 중국 국적을 딴 뒤 1931년 협화의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뉴욕 주립 의과대학 의학박사 학위를 땄다. 그리고 1933년 협화의학원에서 중국에서의 첫 종양과를 창설했다. 다음 해에는 외과 주임인 하로드 레이크스의 추천으로 종양학과 주임으로 일하게 된다. 그때부터 김현택 교수는 중국 종양의학 개척과 발전에 기여하고 평생을 바치며 살게 된다.
그 후 중국엔 9·18사변, 7·7사변이 일어나고 김현택은 일본군의 횡포에 분노하며 더욱 열심히 의술에 힘쓰기로 마음을 먹는다. 1937년 김현택은 미국 뉴욕 맨하탄 기념병원의 종양센터에 파견되어 유명한 교수의 지도하에 종양병리학을 배운다. 그리고 1939년에 중국으로 돌아온다.
1937년 7월 7일에 일어난 노구교사건(루거우교 사건, 7·7사변)은 북경 서남쪽 노구교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벌어진 발포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일본과 중국은 전쟁 상태로 돌입하여 중국 내륙으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7월 28일부터 중국 화북지역(북경, 천진, 하북, 내몽고 자치구에 걸친 지역)에 전면적인 침공과 공격이 개시되며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사건 이후 일본침략군이 협화의학원에 침입해 강제로 문을 닫게 하자 김현택은 천진으로 이주하여 은광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1945년 김현택은 미국 시카고 종양연구소의 초청을 받고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시카고대학 비린스부속병원에서 종양외과를 연수했다. 미국에 계속 남을 것을 원하는 병원의 요구에도 만류하며 다시 중국 천진 은광병원으로 돌아온다.
해방 후 천진시립인민병원에서 종양과 주임으로 근무했으며 천진종양병원의 원장으로 일했다. 천진 종양연구소 소장, 미국 종유외과학회 명예회원이며, 발표한 논문이 70여 편이 남아있고, 중국 종양학의 창시자로 종양 치료 부분에 큰 공헌을 세웠다. 또한, 종양의학 부분에서 고급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썼다. 1990년에 천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중국인 부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과 작은딸이 의료직에 일하고 있으며 막내딸이 현재 천진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큰 딸과 아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일제 시대에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며 험난한 역경을 이겨내고 중국 의학계에 큰 업적을 달성한 위대한 분이다.
김현택 선생님이 생전에 거주했던 집을 찾아가 보았다. 天津市睦南道69号에 위치함. (본인 촬영)
중국 바이두(百度) 인물검색 참고. 《현대중국을 찾아서》 1, 2 (조너선 D. 스펜서) 참고.
이은혜 천진한국국제학교 22년 글로내컬 학부모 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