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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교 학부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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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삶의 조각들

오후 3시. 조용했던 학교가 다시 깨어난다. 학생들이 하나둘씩 학교 건물 밖으로 나오더니 등에 멘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방콕의 더운 날씨 탓에 금세 아이들의 얼굴과 교복은 땀으로 젖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들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그때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교문에 들어선 나를 보고 반갑게 달려와서 안긴다. 그러다가 다시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러 놀이터로, 운동장으로 흩어진다.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30여 분쯤 지났을까. 학교 수업을 끝낸 남편이 나오자 작은 아이가 아빠에게 농구대에 공 던지기 시합을 하자고 했다. 어설픈 드리블을 몇 번 하더니 초등학교 2학년 작은 아이는 친구한테 배운 기술을 뽐내며 농구대로 슛을 쏜다. 골대를 빗나가는 공에 승부욕이 생긴 아이는 초집중하며 공을 던졌고 골대에 공이 들어간 순간, 얼굴엔 세상 가장 밝은 웃음이 번졌다. 그때 학교 화단에 숨어있는 고양이를 찾으러 간 3학년 큰 아이도 이리로 달려와서 이제는 다 함께 공을 던진다. 햇살이 눈부신 이 시각, 가족들이 농구공 하나로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서 여기‘방콕한국학교’에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든 오후였다.

다음 날 아침,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타운하우스’인데 이곳 방콕으로 오기 전까지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던 우리 가족은 3층 주택에 살게 되면서 자연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먼저 아침을 핸드폰 알람소리가 아닌 새가 지저귀는 소리로 시작하게 되었고, 앞집, 옆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가장 먼저 세상의 소식을 알려준다. 또 지금 태국은 우기여서 비가 잦다.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그러자 아이들이 비를 맞겠다고 밖으로 나갔고 한참 뒤에 흠뻑 젖어 돌아온 아이들은 정말 신났다며 그날 일기를 썼다. 그리고 담벼락을 타고 다니는 도마뱀과 귀여운‘찡족’이 나타나면 아이들에게는 세상 즐거운 시간이 된다. 이렇게 소담한 하루를 매일 매일 선물 받고 있다.

그리고 6월의 어느 날 정오를 조금 넘은 시각, 눈에 익은 하늘색 자전거와 함께 ‘띵똥’초인종이 울리더니 그분이다. 입국 후 호텔 격리가 끝나고 이 집에 처음 들어온 날이었다. 모든 게 낯선 그 날, 아이들과 단지 안 수영장에 갔는데 딸과 함께 무척 반갑게 인사를 건네와서 참 친절한 태국분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집에서 직접 만든 음식도, 낯선 땅에서 어려워하는 우리 가족들의 여러 문제도 매번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6월 초 학교에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중, 고등학교가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이 되었다. 남편에 이어 큰 아이도 확진이 되면서, 철저히 격리하고 정말 조심스럽게 생활했지만, 남편과 큰 아이의 열흘간의 격리해제를 하루 이틀 앞두고 작은 아이 그리고 나까지 확진이 되고 말았다. 연이어 확진이 되면서 가족의 격리 기간은 3주로 늘어났고 SNS로 우리 가족의 소식을 전해 들은 그분은 오늘도 괜찮냐며 자전거에 한국 음식을 구해 싣고 왔다. 그리고 가족 모두 확진이 되고 격리가 길어지다 보니 가지고 온‘한국 약’이 거의 떨어졌다. 살던 집의 짐을 정리하고, 이사하고, 짐을 선편으로 부치며 하루하루 태국으로 올 준비에 정신이 없다 보니, 상비약을 넉넉히 준비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헤아린 주변 분들은 남편 편으로, 그리고 휴일에 집으로 직접 약을 가져다 주었는데, 이런 주변의 깊은 배려로 낯선 태국에서의 힘겨운 시간도 잘 넘어갈 수 있었다.

태국에서의 지난 4개월은 이렇듯 ‘환대’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도 한 지역에서만 나고 자라온 아이들은 아빠의‘해외 학교 발령’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래 만난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아쉬움을 안고 여기에 왔었다. 그런데다 초등 2학년은 반 대부분의 아이들이 태국 친구들이라서 태국어도 영어도 거의 할 줄 모르는 작은 아이는 조금 걱정이 되는 듯했다. 그러던 중 작은 아이 담임 선생님과 상담 기간에 통화를 했고 걱정을 이야기했더니, 처음에는 태국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속으로 들어가 너무 잘 지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반 아이들의 따뜻한 환영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나면서 이제 작은 아이는 태국어로 아이들과 장난도 치게 되었고, 큰 아이는 알파벳도 헷갈려 했는데 이제는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상도 받을 정도로 각자의 자리에서 쑥쑥 커가고 있다. 그리고 길고 길었던 3주의 격리가 끝난 오늘 아침, 작은 아이는 가장 먼저 일어났다.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다며 교복까지 벌써 다 입고서는 아빠와 누나에게 빨리 준비하라고 성화다. 나도 덩달아 바쁘게 준비를 했지만, 학교로 걸어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다정하고 들떠 보였다.

이렇듯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순간은 이처럼‘눈이 부시게’빛나는 아름다운 삶의 조각들이다. 그리고 따뜻하게 우리를 품어주고 도와준 많은 사람의 ‘환대’로 인해 선물 받은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게 느껴진다.

지금 여기 태국에서, 아니 푸르른‘방콕한국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은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아름다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태국의 뜨거운 햇살을 양분 삼아 더 많이 보고 더 마음 깊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빛깔을 가진 아이들로 건강하게 자라나길 바라본다.

윤여연 방콕한국국제학교 22년 글로내컬 학부모 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