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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교 학부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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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 여순은 처음이지?

얼마 전 뉴스에서 안중근 의사가 작성한 유묵 중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었던 작품인 “용호지웅세 기작인묘지태(龍虎之雄勢 豈作蚓猫之態)”가 19억 5천만 원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작품은 일본인으로부터 우리나라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묵 중 대다수가 처형 직전 뤼순 감옥에서 작성되었다.

지난 2023년 11월 25일, 나는 여순을 다녀왔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부터, 좋은 인연으로 북경에 계시는 역사공부방 선생님들과 항일 역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꼼짝 못하고 있을 때, 매주 토요일마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던 역사 공부가 나의 탈출구이자 사람들과 소통하는 장소였다.

코로나가 종식된 올해 초 북경에 들러 공부방 선생님들을 만나 함께 답사도 다니고, 때로는 홀로 북경과 천진 지역 답사를 다니는 등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중국 각지에는 우리 선조들이 피땀 흘리며 조국을 되찾기 위해 애쓰쓴 역사적 흔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중한 흔적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사라져가는 역사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11월에 마침 안중근 특별관리실(안중근 취의지)과 국제전시실이 재개관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북경 천진 위해에서 활동 중인 공부방 선생님들이 여순에서 모이기로 했다. 나는 전날에도 북경에 다녀왔던 지라 가방을 대충 꾸리고, 홀로 오후 비행기를 타고 저녁에 대련에 도착했다. 대련에서부터 지하철을 타고 여순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여순 대련 답사 중 행복했던 기억(본인 촬영)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러일전쟁 때 여순 함락 작전에서 전사한 일본군의 혼을 달래기 위해 지었다는 백옥산탑(본 이름은 표충탑)에 올라갔다가, 마침내 목적지인 여순일아감옥구지(旅顺日俄监狱旧址) 박물관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본격적으로 규모가 꽤 큰 감옥 투어가 시작되었다. 시작과 동시에 참혹한 현실에 말문이 막혔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방을 지나 고문실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능력자인 우리 공부방 선생님들 덕분에 별도로 직원이 안내해주는 국제전시실에 들러 안중근, 이회영, 신채호 선생 동상에 헌화를 하고 묵념을 했다.

안중근 특별관리실(안중근 취의지)에 들렀더니, 기사에서 19억 5천만 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는유묵을 비롯해 여러 유묵이 전시되어 있었다. 물론 모조품이다. 한 자 한 자 해석하고 있었는데, 바로 밑에 조그만 글씨로 한글 해석이 있어 모두 한바탕 웃었다.

바로 옆에는 안중근 선생이 처형당하신 처형장이 있었다. 그곳에 가니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안중근 선생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국화 몇 송이를 놓아드리고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혼잣말을 남긴 후 자리를 떠났다.

다음으로, 안중근 선생의 유해 발굴을 하였던 동산포(东山坡) 감옥묘지 터에 들렸다. 이곳은 아파트가 코앞까지 들어서 있어 제대로 발굴을 못하였다고 한다. 동생 안정근이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가고자 했으나 거절당하고, 하얼빈 소나무관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안중근 선생의 유해는 1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쯤 안중근 선생의 유해를 발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중근 선생이 일본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은 장소인 여순일본관동법원 구지에 들러 관장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실제 안중근 선생이 재판을 받으신 장소에 서 보았다. 대련한국학교 학생들의 모의재판 사진을 보니, 안중근 선생의 희생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구나 싶었다. 그 후 안중근 선생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체포되어 여순감옥으로 가던 길에 타고 내렸던 여순기차역구지로 이동했다. 이때 갑자기 우리를 반기는 듯, 서리가 마구 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두부공장으로 사용 중인 신채호 선생의 화장터를 들렸다가, 고물 미니버스를 타고 산중턱에 위치한 203고지를 올라갔다. 이 일정을 마지막으로 호텔로 돌아가 짐을 찾아 지하철을 타고 대련으로 이동했다. 대련 호텔에 도착했더니, 주말 늦은 시간이라 예약해 둔 방이 다 나가버렸다고 했다. 그 덕에 무료로 업그레이드한 큰 방에서 편히 잠에 들 수 있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다음 날에는 상해에서 만주로 이동하던 이회영 선생이 배에서 밀고로 체포되어 일주일 만에 고문사 당하였다고 하는 대련항 인근 수상경찰서구지에 들렸다. 이회영 선생은 당시의 엄청난 거부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인물이다.

만철시리즈 건물들을 쭉 살펴본 뒤 중산광장 주변으로 이동하였다. 중산광장은 동그란 모양으로, 가운데에 공원이 있고 그 주변에 건물들이 동그랗게 늘어서 있다. 신채호 선생이 대만에서 체포되어 대련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던 대련민정서구지(대련경찰서)를 출발점으로 영국영사관구지, 조선은행대련지점, 정금은행구지, 대련시역소(시정부)구지,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청은행구지를 하나씩 들어가서 구경한 뒤, 가운데에 위치한 광장으로 와서 차례차례 건물이름 맞추기를 했던 기억이 마치 어제와 같이 생생하다.

이은혜 재외한국학교 글로내컬 학부모 리포터 2기(천진한국국제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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