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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교 학부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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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아침

세 돌 생일을 지내고 이곳에 온 둘째 아이가 곧 열세 번째 생일을 맞이한다. 흔한 표현인 ‘눈 깜짝할 사이’의 빠르기로 10년의 세월을 타국에서 보내고 있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빠르게 지나간 듯하나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가장 최근이었던 코로나19의 시간을 시작으로, 과거로 돌아가 본다. 그러자 기저귀도 가리지 못한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낯선 동네와 시장을 다니던 내 모습이 기억났다. 큰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 작은아이는 네 살. 그 시절 엄마의 아침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한국에서보다 이르고 먼 등굣길 때문에 겨울에는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큰아이를 깨웠다. 작은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난 무렵부터 나는 대학 부설 어학당에 다녔기에, 나의 등교 준비까지 더해지니 아이를 집에 데리고 있던 시절보다 훨씬 더 바쁜 아침 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사정이 있어도 시간은 흐르게 마련이고, 자식은 크고 부모는 늙는다는 친정엄마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고, 비로소 조금 여유 있는 아침 산책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광저우에서 119번째 한 달 살기’를 하며 맞이한 삼천 몇 번째의 아침, 소소하지만 현지인과 이방인의 그 어디쯤에서 느낀 동네의 아침풍경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사무실과 주거단지가 함께 있는 비교적 번화한 도심이다. 출근과 등교 시간이 맞물리는 시간이 되면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마라톤을 기다리는 선수들처럼 언제라도 튀어나갈 듯한 자세로 신호등을 주시하고 있다. 사람들과 함께 전동차와 자전거가 뒤섞인, 한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진다. 그 속에서 함께 길을 건너며 동네 산책을 시작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따뜻한 카페라떼 한 잔으로 아침을 연다. 주로 가는 곳은 맥카페인데, 저렴한 가격의 커피와 음료를 제공한다. 맥도날드를 비롯한 KFC, 스타벅스 등도 한국과는 조금 다른 아침 세트를 판매하고 있다. 특히 맥도날드나 KFC는 일정한 금액-한 달에 대략 한화 2000원 내외-을 지불하면 원래 가격보다 할인된 가격으로 한 달 내내 아침 세트 메뉴를 제공받을 수 있다. 나 또한 그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매달 새롭게 카드를 갱신한다. 그 외에도 작은 가게들이 아침 일찍부터 손님들을 맞이한다. 보통의 식당들이 아침 7시, 늦어도 8시부터는 문을 연다. 작은 국숫집부터 간단한 찐빵 종류나 만두, 옥수수, 볶음국수 등 여러 가지 종류로, 바로 먹거나 들고 갈 수 있는 것들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있다. 10년 전만 해도 노점도 제법 많았었는데, 어쩐 일인지 지금은 동네에서 보기 드물게 되었다.

[사진] 동네의 맥도날드 전경과 아침 세트 메뉴. 아침 카드가 있는 회원일 경우 원래 가격보다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사진] 빠르면 7시, 보통 8시 전부터 아침 식사를 파는 가게들

아침도 먹었으니 슬슬 동네 산책길에 나선다. 출근과 등교하는 이들 사이를 지나 채소와 고기를 파는 가게 앞에 걸음을 멈춘다. 동네에는 공산품과 과일 채소를 파는 소규모의 마트도 있고 먹거리를 주로 판매하는 가게들도 있는데, 한국과 좀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가게의 규모를 떠나 대부분의 채소 가게 한쪽에 정육 코너가 있다는 것이다. 냉동된 정육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정육 코너는 아직도 조금은 낯설고, 처음 접했을 때는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들은 신선함을 강조하고 당일 판매를 원칙으로 하고 있음을 홍보한다.

[사진] 자주 이용하는 채소와 과일, 해산물, 정육 등을 파는 상점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정육 매대 앞에서, 원하는 부위를 코너에 마련된 집게로 넘겨주고, 손질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 시간이 내가 느끼기에 스스로 가장 현지인 같은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 어떤 다른 곳이 아닌 정육 매대 앞이라니…이유를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아마도 내가 평범한 그들의 일상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어느 나라를 여행하든 슈퍼마켓에 들르는 것을 잊지 않는 편이다. 유명한 장소도 좋지만, 그들의 일상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슈퍼마켓에서 그 나라의 채소로 장을 보고, 그들이 먹는 간식도 즐겨보고, 빵집에 들러 아침에 먹을 식빵을 사는, 별 것 없는 행동들이 주는 소박한 즐거움이 있다. 한국의 전통 재래시장 노점에서 떡볶이나 순대를 먹는 사람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뭐 그런 이유가 아닐까? 물론 대형 마트의 포장된 정육과 상품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생각의 다름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저 나의 작은 생각은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똑같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지 않다고 나쁜 물건이 아니고,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다고 내용물이 모두 그 겉모습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초등학교 앞을 지나친다. 우리 동네의 초등학생들은 남색 바지에 하얀색 체육복 상의를 입고 등교한다. 그 옷이 교복이나 마찬가지다. 학교에 따라 색은 조금씩 다르지만 사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을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딸아이를 고등학생이 아닌 대학생이나 사회인으로 보는 경우를 자주 접하는데, 그들의 눈에는 고등학생의 사복 차림은 낯선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 앞 작은 사거리에 서 있으니, 많은 아이들이 엄마가 운전하는 자전거 뒤나 전동차 뒤에서 빵이나 멸균우유, 요거트 음료, 찐빵 같은 간단한 아침을 먹으며 등교한다. 이들의 아침은 참으로 간단한 듯 보인다. 학교와 집이 가까운 한국의 일반적인 초등학교와는 조금 다르게, 멀리서 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 아이가 다니는 중국학교는 비용을 지불하면 학교에서 아침을 제공해 준다. 아이들은 그저 일어나서 일찍 학교로 가면 되는 것이고, 엄마는 출근길에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면 된다. 바쁜 아침 식사를 위해 들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이는 엄마의 게으름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이고,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일 것이다.

연신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뒤로 하고 조금은 한적한 길로 들어선다. 동네에는 작은 개천이 있고, 개천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는 작지만 정자도 있고, 넓지 않지만 공터도 있다. 정자 밑에서는 소소한 공연이 펼쳐질 때가 있다. 어르신들의 중국 전통악기 공연도 있다. 때로 정자 밑은 노래를 부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노천 콘서트장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옆의 작은 공터에는 10년째 봐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어르신들의 광장무가 한창이다. [광장무广场舞는 광장에 모여 춤을 추는 중국의 거리 문화이다. 매일 아침, 혹은 저녁 무렵, 약속이나 한 듯 중노년층(주로 여성층)이 공터나 공원에 모여 춤을 추는 것을 말한다. 춤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음악의 리듬에 맞춰 한 사람의 동작을 여러 사람이 머리, 손, 발을 이용해서 따라 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광장무의 음악은 빠르고 반복적인 편이라 우아함과는 조금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광장무를 추는 어르신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고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 표정과 함께 이어지는 동작은 연령대에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과하지 않고 충분한 운동효과를 기대할 만한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저 그런 어르신들의 스트레칭이 아닌, 규칙이 있다. 그들의 몸짓에는 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다소 볼륨이 높은 음악을 귀로 들으며, 눈으로는 동작을 따라 하고, 발로 리듬을 맞추며 한참을 지켜보게 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배경과 동작과 음악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사진] 광장무를 추는 여성들과 자전거와 전동차로 붐비는 사거리 모습

음악소리가 점점 작아져 들리지 않을 때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한다. 오늘도 양손 가득 장을 본 나를 발견하고 경비원 아저씨가 반갑게 문을 잡아 준다. 그저 눈을 마주치며 ‘你好 [니하오,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잊지 않고 건네는 인사가 감사하고 행복하다.

1998년에 개봉한 영화 ‘트루먼 쇼’에서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는 항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인사를 전한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각본대로 움직이는 초거대 세트장에서 트루먼 자신만이 각본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나도 혹시 그 트루먼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마치 정해져 있는 대본대로 내가 알지 못하게 돌아가고 있고, 나의 인생은 그 안에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는. 10년째 세트장은 중국이고, 주인공은 중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한국 아줌마. 아침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그들에게는 특별한 것이 아닌 것들을 기웃거리고, 광장무에 함께 참여하지는 않지만 신기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이웃들과는 눈인사를 주로 나누고, 대화해 보지 않으면 외국인임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겉모습은 중국인 같은 그런 주인공 말이다. 50년을 살았는데도, 감을 잡을 수 없는, ‘인생’이라는 두 글자가 살아갈수록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도 오늘 같은 평범한 일상을 바라는 것이 무슨 재미냐고 묻는 이들이 있으리라. 살아갈수록 스펙터클하고 눈에 보이는 재미보다는, 내일도 오늘 같고 모레도 오늘 같은, 마치 일주일을 시청하지 못해도 줄거리를 눈치 챌 수 있는 일일연속극 같은 인생을 바란다. 입을 가리며 놀라는 액션영화가 아닌 ‘인간극장’ 같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기를 바란다.

오늘은 이제 막 시장에 나오기 시작하는 딸기를 조금 담아왔다. 어제 귀가한 두 녀석이 벼르던 탕후루를 만들겠다면서 부산스러웠었다. 지난여름 한국에서 먹었던 탕후루 이야기를 이어가더니, 집에 딸기가 없던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어제 시도한 탕후루는 처참하게 실패했고, 다음에는 딸기도 꽂아 다시 해 보자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담아 온 딸기이다. 딸기를 씻어 건지고, 장 봐온 채소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오늘도 어제 같은 아침을 마무리한다.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다. 어제는 이웃주민 3과 인사를 했고, 오늘은 경비원 1을 만났다. 오늘의 소품은 딸기였지만, 내일은 두리안이 될 수도 있겠다. ‘119번째 광저우에서 한 달 살기’의 주인공은 오늘도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을 그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 [광장무]의 내용은 위키백과를 참조했으며, 사진은 모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조영미 재외한국학교 글로내컬 학부모 리포터 2기(광저우한국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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