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수(숫자)를 좋아해요?
음.… 31요.
31? 아이스크림 31? 왜 31을 좋아해요?
독립기념일이라서요.
수(number)를 주제로 수업을 하면서 나라마다 선호하는 수가 다르고 수와 관련된 문화 이야기를 해보는 시간이었다. 흥미 유발을 위해 가볍게 한 질문이었지만 아이들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이스크림 이름도 아니고 독립기념일이어서 좋은 숫자라고 말하는 아이들. 순간 지난 8월 마지막 날 자정부터 새벽까지 미치도록 가슴 떨리던 날이 떠올랐다.
저녁 8시 학생들과 교사는 말레이시아 바주꾸롱 전통복을 깔끔하게 입고 운동장 가운데 모였다. 학교 건물에 걸린 스크린에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다. 모두 바닥에 앉아서 영화를 보고 기념사진도 찍는다.
1부 영화 시청하고 기념사진 찍기(학교 운동장)
잠시 후 학생자치회에서 마련한 음식을 사 먹고, 교사들은 가족과 함께 즐긴다. 10시쯤 되자 강당에서는 꽃꽂이, 독립기념일 관련 메이크업, 전통 바나나잎 엮기 등의 시합과 시상이 있다. 30도 넘는 더위에 땀 흘리고 수업하고, 씻고 자야 할 시간에 피곤하게 학교에서 학생과 교직원들과 있다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2부 화장하기(강당)
2부 잎으로 끄투팟(Ketupat) 엮기
독립기념일 노래부르기
11시 50분이 되자 교직원, 학생, 가족들 모두 잔디로 삼삼오오 모여서 국기를 나눠 갖는다.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처럼 독립기념일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파이브, 포, 쓰리, 투, 원 와! 와!
펑펑 터지는 폭죽 소리. 사람들이 국기를 함께 흔들고, 한목소리로 말레이시아 국가 독립과 관련 노래를 귀가 아프게 소리 높여 부른다. 나도 모르게 내 가슴이 뛴다. 나도 손에 든 말레이시아 국기를 세게 흔들고 후렴구를 흥얼거린다. 독립기념일이 있는 8월 내내 길거리, 상가 어딜 가든지 ‘나의 조국(Negaraku)’ 국가를 들을 수 있고, 너무 많이 들어서 음악이 나오면 흥얼거릴 수 있다.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자정 이후로 새벽까지 폭죽 소리를 밤새 들을 수 있다. 거의 8월 한 달 내내 독립기념일 축제 분위기다.
말레이시아도 우리나라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었고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이 물러난 역사가 있다. 말레이시아는 이후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지 65년 됐다. 우리나라는 말레이시아와 비교가 안 되게 더 긴 식민지 기간을 거쳤는데 우리의 광복절은 어떤가? 너무 형식에 그치지 않고 있는 건 아닌지? 이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광복절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부끄러웠다. 이들보다 더 기뻐해야 하고 더 크게 폭죽을 터트려야 하는 것은 대한민국, 우리가 아닌지!
언어는 그 나라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날의 가슴 떨리는 흥분과 반성 이후로 한국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비교하면서 수업 구상을 하고자 했다. 말레이시아 중등학생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Sijil Pelajaran Malaysia; SPM)에 역사(Sejarah)가 있어서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한국어 표현, 문화에 대해서 예를 들 때 역사 이야기를 함께 하면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말레이시아, 이곳에서 내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는지, 한국어를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배웠다. 한국어는 내가 더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어를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정성껏 수업한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수는 15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31과 내가 좋아하는 15 사이에는 언어를 넘어 서로의 나라를 사랑하고,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흐르고 있다.
김경민 말레이시아한국교육원 파견봉사교사(국립국제교육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