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고있던 남편과 2001년도에 결혼 후 한국 땅을 떠나 중국 땅을 밟았다. 남편은 결혼 직전에 산동성 청도로 발령이 나서 청도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청도에는 한국학교가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 아이들이 중국 현지 학교나 외국계 국제학교에 다니다 보니 발음이 어눌하고 한국어 실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많았다. 화교학교 교실 몇 개를 빌려 매주 토요일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교사가 부족하니 한국어 교사자격증 소지자는 모두 모이라는 소식을 듣고 6개월간 한글학교 교사로 봉사를 했다. 한글학교에서는 초중등 각 학년 두 개 반으로 운영되었으며 국어와 수학 그리고 음악 과목을 주로 가르쳤다. 큰아이를 가지고 입덧이 너무 심해서 한글학교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있는데, 친정엄마가 만들어 주시던 감자수제비를 얼마나 먹고 싶던지…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친정인 부산으로 가서 큰아이를 낳았다. 그 당시 중국 청도의 의료수준은 열악해서 임신 7개월쯤 대학 산부인과에 검진을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누워있는 산모의 배를 손으로 모아 산모 배 위에 줄자로 태아의 크기를 측정해서 알려주던 일도 있었다. 출산 후 청도로 생후 90일 된 큰아이를 데리고 돌아갔는데 때마침 사스가 유행했던지라 마음을 졸이며 매일 집안을 소독하고 지냈다. 또 당시 중국엔 우유 멜라민 파동으로 현지 우유는 먹일 수가 없는데 한국 분유는 수입이 안 되던 시절이라 한국에서 분유를 바리바리 싸서 왔고, 매번 청도로 출장 나오시는 한국 지인에게 부탁해서 분유를 조달했다.
2003년 말 남편이 다시 상해로 발령이 났다. 돌쟁이를 데리고 상해로 가서 집을 보러 다니고 주변 지인들을 초대해서 집 근처 한국식당에서 어설픈 돌잔치도 치렀다. 그때는 왜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던지 남편이 퇴근하면 돌쟁이를 맡기고 틈틈이 학원에 다니며 중국어 공부를 했다. 상해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개방된 상업도시라 웬만한 시설은 한국보다 더 좋았고. 상해 사람들도 무척 친절했기에 외국인인 우리가 살기에 편했지만, 상해 이남 지역에는 법적으로 집안에 겨울 난방 시설이 없었기에 너무 추웠다. 온풍기에 라디에이터까지 구입해서 생활했더니 한 달 전기세가 너무 많이 나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집 안에서 털실내화와 패딩 잠바는 필수품이었다.
큰아이가 세 살 무렵이던 2005년에 남편이 다시 심천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심천은 홍콩 바로 옆 중국의 남쪽 광동성에 위치하고 아열대 기후라 일 년에 6개월 이상 야외에서의 물놀이가 가능하다. 동네 앞 공원을 걷다 보면 길가에 망고나무와 포도나무에 과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집에서 창문을 내려다보면 키 큰 야자수가 눈에 들어온다. 또 다수의 아파트 내부에 야외 수영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아침이면 아들에게 수영복을 갈아입혀 튜브에 태워 놓았는데 물 위에서 꾸벅꾸벅 잠들어 있던 귀여운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수시로 스콜 같은 소나기가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졌다 그쳤다 해서 유모차에 우산과 비옷을 항상 구비해 두었는데 막상 소나기가 내리면 우산을 펴서 유모차를 덮느라 나는 늘 비옷을 입기 전에 비 맞은 생쥐꼴이 되었다. 또 심천에서는 홍콩까지는 고속철도로 30분이면 갈 수 있어서 부지런히 유모차를 밀며 자주 놀러 다녔다. 홍콩엔 지하철로 이동하기가 좋아 무거운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면 어디서건 친절한 홍콩시민들이 달려와 함께 유모차를 들어주었다. 몇 년 전에 지금은 대학생이 된 큰아들과 둘이서 홍콩을 다시 들렀는데 유모차를 힘껏 밀고 다녔던 추억의 장소들이 너무나 뚜렷이 떠올라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2006년 남편이 북경으로 다시 발령이 나 심천에서 이삿짐센터에 짐을 먼저 보내고 나서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호텔에서 하루 묵고 난 다음날 이삿짐이 도착해서 중국 땅이 정말 넓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다. 당시 북경은 200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어서 곳곳이 공사장이었다. 시내에 나가면 워터큐브(水立方) 수영장과 올림픽 주 경기장(鸟巢)이 하루가 다르게 완성되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 한국에서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준비로 차례 지키기,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않기 캠페인이 한창이었듯이 당시 중국에선 자연스러웠던 한여름 아저씨들의 웃통 벗고 돌아다니기 금지 캠페인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2007년도에 메이드 인 베이징이었던 둘째를 한국에서 낳고 북경으로 돌아와 2008년 봄에 이곳 천진으로 둥지를 옮겼다. 갓난쟁이를 등에 업고 이삿짐 정리를 하다가 코피도 흘렸지만 그땐 젊어서 힘든 줄도 몰랐다. 꼬맹이 둘을 데리고 2008년 8월 8일에 열렸던 베이징 올림픽을 보러 가고 김연아 선수가 출전한 스케이트 경기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다행히 북경과 천진은 고속열차(高铁)로 30분 거리이다).
2008년 이곳 천진은 조용한 회색 도시였다. 북경이나 상해와 같은 대도시는 아니지만 대도시에 비해 물가가 싸고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축구, 농구, 야구, 테니스 등)도 자주 열려서 늘 태극기를 준비해서 경기를 보러 갔다. 한번은 천진 빈하이(滨海)에서 열린 야구 시합에 한국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있어 평일 낮에 혼자 시합을 보러 갔다. 경기가 끝날 무렵 핸드폰 배터리는 없고 외진 곳이라 주변에 택시가 한 대도 없었다. 경기장 앞에 공안(경찰)차량이 보이길래 “나는 한국인인데 야구 경기 보러 왔는데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라고 말했더니 공안들이 친절하게 차를 타라며 주변에 있는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버스 타는 모습까지 본 뒤 떠나서 참 고마웠다. 주변 지인들에게 공안 차량을 타봤다고 말하면 지금도 다들 깜짝 놀란다.
그리고 당시 세 살이었던 둘째가 열이 나고 감기로 아파서 천진 아동병원에 갔더니 대기자가 100명이 넘었다. 중국엔 한국처럼 작은 개인병원이 없다. 중국 지인의 도움으로 진료를 받고 나서 링거 맞으라는 곳에 갔는데, 100개 정도의 침대가 한 공간에 놓여 있었다. 줄을 서고, 발버둥치는 아들의 이마에 링거 바늘을 꽂은 뒤 2시간 동안 침대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것도 3일간 반복으로! 중국 사람들은 아기 한 명이 아프면 부모와 시부모, 외가 부모까지 총 6명의 어른이 아예 도시락을 싸 들고 출동했다. 병원 한 번 다녀오면 하루가 다 갔다. 당시 병원 상황이 이러해서 아이가 열이 나면 한국으로 비행기 타고 나가서 치료받고 오는 한국 가족도 적지 않았다. 늘 집에 비상약을 두고 겨울이면 조마조마하며 살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크게 아프지 않고 잘 자랐다. 둘째가 유치원생이던 2012년 가을에 나는 마흔의 나이로 천진 남개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잠을 줄여가며 겨우 졸업했다. 깨어있는 의식을 가신 교수님들과 젊은 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며 중국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 대학원 졸업 후 평소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지라 순수 아마추어 비종교 단체인 ‘천진 한인 여성 합창단’에 가입해 4년 반 동안 활동했다. 매 연말에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고 적지만 수익금을 기부했는데 한번은 ‘홀로 아리랑’을 부르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눈물 흘리던 교민분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6년째 천진 한국인 주부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같은 책을 읽어도 저마다 감상문이 다양해서 늘 감사하다. 전통적인 것에도 관심이 많아서 중국 선생님을 찾아 서예와 다도, 중국 전통 꽃꽂이를 배우며 중국문화를 체험했다. 작년 하반기부터는 북경, 상해 한국 교민분들이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인문학, 역사, 동양고전 강의를 듣고 있는데 중국 전역에서 애쓰시는 분들과 함께 공부하고 교류하며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다. 정말이지 한국의 미래는 밝다!
2020년부터 발생한 코로나로 힘든 상황이 시작되었고 늘 듬직하고 학교에서 모범적이던 큰아이는 어려움 속에서 고3 생활을 잘 마치고 대학 합격의 기쁨을 맞이했다. 올 초 1월에 상상을 초월하는 중국의 코로나 통제를 뚫고서 홀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들은 현재 대학교 1학년 생활을 즐겁고 씩씩하게 하고 있다. 이제 중3인 둘째 아들도 온라인 수업이 길어지며 체험학습도 못 가고 조금은 안타까운 중학교 과정을 보내고 있지만 자기의 꿈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애쓰고 있으니 그간 중국 생활이 헛되진 않았다 싶다.
다만 한 가지,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자주 못 뵈어 참 죄송한 마음이 든다. 울 엄마는 매번 다른 집 딸은 늘 엄마와 백화점도 같이 가고 여행도 자주 가서 부럽다고 말씀하신다. 뉴스에서 중국에 대한 걱정스러운 내용이 보도되면 바로 내게 전화를 거신다. 내가 큰아들을 한국으로 보내보니 우리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늘 걱정되고 보고 싶은 마음… 그게 부모의 마음이라는.
3년을 계획하고 중국으로 온 우리 부부는 올해 중국 생활 22년째를 맞이했다. 그간 아들 둘을 데리고 여행도 많이 다녔고 특히 한국인의 정체성을 일깨우기 위해 한국의 역사와 관련 있는 곳을 찾아 많은 유적지도 다녔다. 여전히 중국엔 갈 곳도, 가야 할 곳도, 가 보고 싶은 곳도 많다. 그동안 좋은 중국 이웃들도 많이 만났다. 최근 3년간 코로나의 통제 속에 매일같이 반복되는 핵산검사를 받으며 풀리지 않는 숙제(이방인으로서 이곳 중국에서 성장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자라지만 학교밖에서는 사회주의 국가의 통제를 받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알려주는 문제)와 어려움은 여전히 있지만, 20여 년 생활 터전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우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민간 외교관으로 자랑스럽게 살아가고 싶다. 곧 좋은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천진 문화중심 天津文化中心 (본인 촬영)
이은혜 천진한국국제학교 22년 글로내컬 학부모 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