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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무릎

천사를 만나 본 적이 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저는 정말 천사를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다짜고짜 이 얘기를 하면 종교와 신앙에 심취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 특별한 종교를 믿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시험 종이 울리기 전,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그 순간 생각나는 온갖 신에게 기도해본 적은 있지만, 막상 제가 경험한 종교체험이라고는 친구 따라 교회에 가 보았던 정도입니다.

제가 처음 천사를 만난 것은 5살이 되어 일본 유치원에 막 입학했을 때입니다. 유치원이라는 작은 사회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 그 5살짜리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전혀 다른 세계에 와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자신이 사용해 왔던 한국어가 아닌, 외계어와 같이 들리는 일본어밖에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모두 모래성을 쌓고, 블록 놀이도 하고 재미있게 노래도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저는 일본어를 할 줄 몰라 친구들 주위에서 서성이기만 했었습니다. 동화책 속에 나오는 천사가 정말로 있다면 얼른 저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정말로 데리러 온 게 아닌가요? 저는 냉큼 유치원을 빠져나와 누군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토해내듯 이야기했습니다. “나도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고 싶고, 외계어도 알아듣고 싶어. 여기 싫어! 집에 가고 싶어!!” 하며 제가 원하는 걸 한바탕 쏟아냈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는 “시간이 지나면 알아들을 수 있을 거야. 이제 집에 가자.”라고 하며 제 손을 꼬옥 잡아주었습니다.

해외 출장이 많은 회사업무에 아빠가 집에 계시지 않을 때가 많아서 엄마는 어린아이 둘을 타지에서 홀로 도맡아서 키우셨습니다. 엄마는 아토피 때문에 늘 손이 퉁퉁 부어 있을 만큼 불편할 때도 많으셨지만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저희를 한없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숟가락 한번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엄마는 유치원에 다녀온 저를 무릎에 앉혀 놓고 밥을 먹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엄마! 화장실이 일본어로 뭐게?”, “엄마! 잘 먹겠습니다는 일본어로 이타다키마스야!” 저는 오물오물 음식을 씹으며 매일 제가 배웠던 것들을 엄마에게 자랑했습니다. 엄마는 진작에 어린 딸이 그날 배운 것을 아는 체하고 싶은 것임을 아셨고, 엄마는 다 알고 있으니까 언제나 저에게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엄마는 이 시간을 무척 좋아했고, 그렇게 타지에서 둘은 함께 성장해나갔습니다.

그 시절의 제가 일본어를 받아들이고, 친구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엄마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유치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오직 저만을 위해, 서툰 일본어 실력을 무릅쓰고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친구들과 엄마들을 우리 집에 자주 초대하셨습니다. 엄마 역시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곤니치와”와 “아리가토 고자이마스”등의 기본적인 인사말뿐이었지만 일본인 엄마들과 조금이라도 소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고, 그 큰 용기는 제가 친구들과 조금이라도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유치원에만 가면 입을 다물고 혼자 놀기 익숙했던 저는, 엄마가 했던 것처럼 먼저 친구들에게 다가가며 조금씩 용기를 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무료하게 느껴질 만큼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그 일상에서 여러 상처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저는 오래된 앨범의 먼지를 털 듯, 천천히 눈을 감고 유치원 때 엄마 무릎에 앉아서 조잘거리던 추억을 반추해봅니다. 학교 공부에 정신을 쏟다가도 때로는 예쁜 노을과 잔잔한 음악, 그리고 향기로운 꽃에 한눈을 파는 이유는 그 당시 엄마가 내주셨던 큰 용기와 따뜻한 사랑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엄마는 움츠리고 숨기보다는 무엇이든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는 삶의 지혜를 직접 보여주고 가르쳐 주신 고마운 스승이자 용기 있는 영웅입니다. 인류발전에 공헌한 세계적인 영웅들이 영웅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잊힌 영웅은 영웅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어린 딸의 작은 가슴에 용기라는 씨앗을 심어주고, 따스한 햇살과 포근한 사랑의 양분으로 푸르고 건강한 나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준 엄마의 사랑을 저는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기에 엄마는 저의 영웅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가 그러했듯, 저도 누군가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영웅이 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무릎을 내어주는 따스한 영웅.

백채민 동경한국학교 22년 글로내컬 학생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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