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필리핀한국국제학교 교사
매일 아침,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지닌 아이들이 한 교실에 모입니다. 2020년생부터 2022년생까지 세 연령이 함께 생활하는 ‘새싹반’ 교실에는 영어, 따갈로그어, 한국어 등 서로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꿈둥이 아이들이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언어와 발달 수준이 제각각인 이 교실에서, 어떻게 하면 모든 꿈둥이들이 ‘한국어’라는 또 하나의 날개를 달 수 있을까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유아들이 점차 언어를 확장해가면 ‘선생님 밥’, ‘이거 장난감’과 같은 전보식 문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발음에서도 ‘ㄸ,ㄲ,ㅃ’ 등의 경음이 자주 사용되는 따갈로그어의 영향으로 ‘고기’를 ‘꼬기’로 발음하는 경음화가 자주 나타납니다. 이러한 모습은 때때로 또래 간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요.
많은 학부모님들이 자녀를 재외한국학교 병설유치원에 보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한글 교육'입니다. 해외에 거주하는 동안에도 한국어를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해, 자녀가 한국어를 지속적으로 접하고 사용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찾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한국과 달리, 필리핀 현지에는 한국어 교육 인프라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재외한국학교 유치원은 아이가 정규 교육과정 중 한국어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자, 모국어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1. 아이마다 다른 속도, 개별 맞춤형 수업 설계
유치원 교육과정은 교과서가 없습니다. 따라서 교사의 수업 연구와 전문적인 관찰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교사는 일상생활 속에서 유아들의 언어 사용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며,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언어적 반응을 분석하여 각 아이의 언어 발달 수준을 면밀히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유아들을 수준별 한국어 발달 그룹으로 분류하고, 각 그룹에 적합한 맞춤형 수업 자료와 활동을 설계합니다. 예를 들어, 기초 수준의 아이에게는 단어 인식 및 반복 말하기 중심의 활동을, 중간 수준에게는 문장 구성 및 상황 표현 중심의 활동을, 고급 수준의 아이에게는 간단한 이야기 만들기나 의사 표현 확장 활동을 제공합니다.
2. 가정과 함께하는 한국어 성장 이야기
다문화가정 학부모들에게, 하교 후 가정에서 실천할 수 있는 한국어 지도 방법을 구체적으로 안내하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와 함께 짧은 한국어 동화책을 읽거나, 자주 쓰는 단어를 포스트잇에 적어 집안 곳곳에 붙여두는 방법, 아이와 대화할 때 간단한 문장을 한국어로 시도해보는 방법 등을 제시하며, 실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어가 노출되도록 유도합니다.
학기 초 유치원 아이들은 언어가 같은 또래끼리 놀이그룹을 형성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영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친구들과만 어울리게 되고, 한국어 노출 기회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사는 학기 초부터 다양한 ‘우정 활동’을 제공하고 플레이데이트를 통해 서로 다른 언어권의 아이들이 더욱 친밀해질 수 있도록 학부모 간 연결을 적극 도모합니다. 실제로 이 같은 연결이 이뤄지면, 아이들이 방과 후에도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또래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접하고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됩니다.
3. 일상에서 살아있는 말, 또래와의 대화 속 언어
친구에게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연습,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말로 표현하는 훈련, 그리고 또래 간의 갈등 상황에서 사용하는 중재 언어까지, 이 모든 것이 교실 속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지도되는 한국어 학습의 중요한 축이 됩니다. 특히 ‘감정 프로젝트’는 이러한 언어지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슬퍼요’, ‘화가 나요’, ‘기뻐요’와 같이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해보는 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자기표현 능력을 기르고, 더불어 타인의 감정도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능력 또한 함께 자라납니다. 이러한 말하기 중심 활동은 단순히 어휘를 늘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이들 간의 관계, 정서, 사회성까지 아우르는 언어교육의 핵심입니다.
4. 통합적 표현 활동과 허용적 분위기를 통한 언어 자신감 키우기
새싹반에서는 언어지도를 신체 표현, 미술 등 통합적 활동과 연계하여 다감각적으로 접근합니다. 만 4세 아이들 중에는 틀리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말하기를 주저하거나, 자신의 한국어 표현이 틀리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틀려도 괜찮다’는 허용적인 분위기를 교실 안에 조성하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글자를 만들어보거나 이야기를 지어내어 읽어보는 활동, 스스로 낱말을 구성해보는 시도를 격려하며, 실수도 자연스러운 학습의 일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특히 학기 초에는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어린이들도 많이 입학하기 때문에, 이야기 나누기 수업에서는 단어에 그림을 함께 그리거나 시각자료를 제공하고, 때로는 영어로 한 번 더 명명해주는 방식으로 모든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언어 환경을 마련합니다.
5. ‘꿈자람 한국어 수업’ 운영: 방과 후에도 이어지는 배움
한국과 달리, 현지에서는 아이들이 정규 수업 외에 한국어 교육을 받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과 학부모님들의 수요를 반영하여, 12주간의 방과 후 한국어 수업을 운영합니다. 수업은 단순히 글자를 익히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퀴즈, 게임, 노래, 색모래, 클레이, 종이 등 다양한 감각 재료를 활용한 활동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수업이 종료된 후에는, 모든 아이의 12주간 한국어 발달 변화 양상을 분석하여 개별 리포트로 정리하고 이를 학부모님께 전달하였습니다. 리포트에는 아이의 현재 한국어 능력 수준뿐 아니라, 향후 더 집중적인 지도가 필요한 부분, 강점이 잘 드러난 영역 등이 담겨 있어, 가정에서도 연계 지도를 할 수 있는 근거 자료로 활용됩니다. 유치원과 가정이 함께 아이의 한국어 발달을 지원하는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학부모님들과의 신뢰 형성과 소통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6. 필리핀이라는 환경 속, 교사는 중요한 언어모델입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교사는 아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언어모델이 됩니다. 따라서 교사는 가능한 한 정확한 발음, 풍부한 어휘, 다양한 문장 구조를 사용하여 말하고, 아이들이 듣고 모방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발음 지도에서는 '반향적 지도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시) 유아 : Teacher, 이거 아니 Shark? 교사: 이거 상어 아니야? 유아: 네. 상어 아니야
즉, 아이가 한 말을 교사가 조금 더 다듬어 되받아 주고, 다시 아이가 반복하게 하며 자연스럽게 언어를 정교화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입니다. 이를 위해 교사는 아이의 언어 사용 맥락을 잘 이해하고, 상호작용 시 더욱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7. 그림책과 운율 있는 말놀이를 활용한 듣기 환경 조성
유아기의 언어 발달은 시청각적 자극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그림책은 단순한 읽기 자료를 넘어 듣기 교육의 핵심 매체로 활용됩니다. 교사는 풍부한 표정과 생생한 억양,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그림책을 읽어주며 아이들의 몰입을 이끕니다. 아이들은 교사의 목소리를 따라가며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고, 주요 단어와 표현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됩니다. 또한, 말놀이 동요와 동시처럼 운율감 있는 언어자료는 반복성과 리듬감을 통해 아이들의 청각적 주의를 집중시키고, 어휘력 향상에도 효과적입니다.
8. 풍부한 문식 환경 구성으로 자연스러운 한글 노출 유도
유아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환경에서 학습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따라서 교실 곳곳에 한글을 노출시키는 문식 환경 구성을 통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글자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교실 내 모든 장난감, 가구, 교구, 친구들의 자리에는 한글로 라벨링을 하여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글자를 접하게 하였습니다. 한국 교수학습 지원비를 활용해 글자 블록, 낱말 카드, 한글 퍼즐 등 자료를 구비하였으며, 언어 영역에는 난이도별로 구성된 그림책을 비치해 유아의 수준에 맞는 읽기 활동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작품을 게시할 때 사용할 이름표를 직접 만들어보게 하여, 쓰기에 대한 관심과 자발성을 유도했습니다. 글자 쓰기를 놀이처럼 즐길 수 있도록 무지개 색연필, 반짝이 펜, 다양한 디자인의 연필 등을 준비하여, 유아가 한글에 흥미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접근하도록 환경을 구성했습니다.
9. 교사 간 연구모임과 상호 성장
필리핀한국국제학교 병설유치원은 2명의 한국 교사와 2명의 영어 교사가 함께 팀티칭을 하며, 다양한 언어 배경의 유아들을 통합적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사들은 서로의 수업 경험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협력적 배움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평적이고 유연한 교사 간 네트워크는 특정 교사의 일방적 수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성장하는 실질적 동반자 관계를 만들어 줍니다. 다양한 수업자료나 언어 지도 방법, 한국어-영어 병행 수업에 대한 아이디어가 오가며, 유아의 전인적 발달을 위한 교육공동체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함께 나누는 사례의 힘
이 글은 세계 곳곳의 재외한국학교 유치원 교사들과 함께 이중언어 및 다문화 유아의 한국어 지도에 대한 사례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교과서가 없어도, 환경과 교사의 언어가 곧 교과서가 됩니다. 이 땅의 작은 교실 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말의 씨앗을 심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자라 언젠가 아이들 안에서 꽃피기를 조용히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