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교육기관포털 온라인소식지 Vol.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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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교 이야기 학부모 이야기

칼럼·에세이
한국어로 지은 집

은은희 동경한국학교 학부모

아이가 동경한국학교 초등부에 막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세 살부터 여섯 살까지 일본어 네이티브인 친구들과 뛰놀며 지냈던 아이였다. 입학 후 며칠 동안 학교에서는 부모가 교실에 같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등교 이틀째가 되던 날, 아이가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고 막 나오던 참이었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아이는 급히 따라 나오며 나를 불렀다. 어쩐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엄마, 호주머니가 뭐야? 체육복으로 갈아입는데 선생님이 교복 넥타이를 호주머니에 넣으래, 난 호주머니가 없는데….” 나는 웃음을 참으며 잘 설명해 주었다. 그랬다. ‘주머니’는 알지만 ‘호주머니’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동경한국학교의 학부형으로 지내온 지 올해로 12년이 되었다. ‘호주머니’를 알지 못해 화들짝 놀랐던 아이의 언어 주머니 안에 풍성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단어들이 가득 자리를 잡았다. 아이의 키와 마음이 자라며 그 안에 겹겹이 품어가는 한국어의 몸집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단어가 모여 문장을 이루듯 집과 학교에서 경험한 수많은 조각들이 모여 아이 삶의 문장이 되고 그 문장들이 모여 생각이 되고 가치관이 되었다.

입학 전 초등학교 선택에 고민이 많았었다. 집 근처에 있는 로컬 학교를 견학하기도 했는데, 당시 고학년 교실의 뒷면에 학생들의 서예 작품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똑같은 글자를 정성스레 써서 전시한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다. 그 후 한국학교에 방문했을 때, 복도의 벽면에는 역시 학생들의 서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유’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각양각색의 뜻깊은 글자들이 적혀 있었고, 아마도 아이들마다 마음이 닿는 글자를 선택해 적은 것으로 보였다. 그 다양한 한글의 풍경이 좋아 망설임 없이 한국학교를 선택했다.

아이가 생각하는 토대를 이루는 말의 기초가 한국어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 바탕 위에 이 모양 저 모양을 한 언어의 집들을 쌓아가기를 또한 바랐다. 타국에서 내 나라말을 명확하게 구사하고 품게 하는 것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가장 큰 발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학교는 그 의지를 키워가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좋은 선생님들과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공룡 박사가 되고 싶었던 아이는 한국학교의 선생님들을 만나고 나서는 한때 ‘선생님’으로 꿈을 수정하기도 했다. 다정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뛰놀며 많은 꿈들을 키워갔다. 팬데믹으로 인해 초등학교 졸업식도, 중학교 입학식도 약식으로 했던 일은 아쉬우면서도 동시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조각이 되었다.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는 엄마인 나도 초등생이 되었다가 아이가 중학생이 되니 나 역시 중학생의 마음으로 회귀했다. 중학생인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던가 자주 돌아보곤 했다. 그때의 내가 읽고 두근거렸던 책, 흠뻑 빠져있었던 노래, 좋아하던 과목들을 반추해 보며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국학교가 아니었더라면 그 기억과 그 마음의 세밀한 표정을 온전히 공유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고등부에 입학하자 또한 치열했던 나의 고등학교 3년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고등 3년을 우리는 매 순간 함께 즐겁고 열정적으로 지내온 것 같다.

우리 모두에게 학창 시절이란 그 시기를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달콤한 꿈 같은 시간이었는지 인식하게 되는 듯하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어른이 되면 엄청나게 근사하고 멋진 삶이 끝없이 펼쳐질 거라는 즐거운 착각이 그 시절의 빛남과 소중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리라. 아이가 기억하는 한국학교에서의 학창 시절은 분명 아련한 그리움으로 가슴 한편에 깊이 새겨져 마음의 뿌리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모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주변 공기의 일부분에 언제나 ‘그리움’이 떠다니는 삶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수많은 형체를 띄고 있는 그리움들 중에서도 ‘한국어’에 대한 그리움은 모국을 떠나보아야만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한국어, 그리고 한국이란 나라가 더욱 각별한 것은 내가 그 일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학교의 연례행사라고는 하더라도 매년 어버이날 아이가 한글로 쓴 편지를 받을 때, 고전문학 시간에 직접 써 본 시조를 집에 와서 낭송해 줄 때, 친구들과 까르르 웃으며 한국어로 수다 삼매경에 빠진 아이의 모습을 볼 때, 나는 한국에 대한 내 그리움의 그릇에 무언가 따듯한 것이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이제 곧 그 반짝이던 학창 시절을 뒤로하고 한국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날아오를 아이. 그리고 아이와 함께했던 친구들 한 명 한 명의 모든 존재들에게, 그리고 그 아이들을 키워낸 부모들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국의 땅에서 온전한 한국어의 집을 짓고 아이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