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온 하노이한국국제학교 학생
글로내컬 리포터 4기
초등학교 1학년, 나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처음 해외 생활을 시작했다.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내 삶의 대부분은 한국이 아닌 인도네시아에서 채워져 있었다. 그렇다. 인도네시아는 나에게 제2의 고향이었다.
사계절이 아닌 우기와 건기로 나뉜 열대의 나라.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자라나며, 달콤한 열대 과일과 붉게 물든 노을을 일상처럼 마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만 마주쳐도 환히 웃어주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친구들과 매일 붙어 지내며 반복되는 학교 행사들을 때로는 지겨워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상이었는지는 그곳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베트남 이주는 정말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준비할 시간도, 마음을 정리할 여유도 없었다. 출국 전날까지도 친구들과 웃고 떠들었고, 이별의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하늘을 날아 도착한 낯선 도시 하노이에서의 첫날, 그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베트남에 오기 전까지 내가 아는 이 나라는 쌀국수, 반미, 그리고 어린 시절 여행했던 다낭과 하롱베이가 전부였다. 그저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름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나라였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한국과 닮은 점이 많았다. 한국인 교민도 많고, 한국 물건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북쪽에 위치한 하노이에는 겨울도 있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보다 경제 규모는 작지만, 삶의 방식은 훨씬 익숙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재외한국학교라 하여 마음 놓고 등교했지만, 첫날의 기억은 낯설고 외로웠다. 베트남은 인도네시아보다 학생 수가 훨씬 많았고, 학교 어디를 가든 학생들로 북적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전교생이 서로의 이름을 알았고, 전학생이 오면 모두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하노이에서는 달랐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기존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흩어졌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급식실의 소란 속에서 홀로 앉아 먹는 밥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인도네시아에서 나를 귀찮을 정도로 챙겨주던 친구들이 몹시 그리워졌다.
체육 시간, 체육복을 갈아입고 돌아오니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체육관을 혼자 찾아 헤매며 복도를 걷던 그때,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나는 전학생이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깨달았다. 나는 단지 이곳에 적응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마음을 바꿨다. 조별 활동이나 발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경험을 나누었고, 친구들이 시도해 보지 않은 방식들을 제안했다. 다행히 친구들은 흥미를 보였고, 우리 조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어느새 대회에서 상을 받고 전교생 앞에서 발표하는 기회도 생겼다. 그렇게 친구들과 가까워졌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졸업식
하노이한국국제학교 동아리활동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시험이 끝나면 마라탕을 먹으며 노래방에서 목청껏 함께 노래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다. 다양한 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베트남 곳곳을 여행하면서, 낯설지만 새롭고 그래서 더 재밌는, 내 삶이 새로운 바다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익숙하고 안전했던 항구를 떠나 조금은 거칠지만 훨씬 더 넓은 바다를 만난 것이다.
요즘도 가끔 베트남 사람들의 무뚝뚝한 표정을 보면, 늘 친절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베트남 사람들도 표현은 서툴지만 마음은 따뜻하다는 것을. 어쩌면 인도네시아를 떠났기에, 그 진짜 따뜻함을 제대로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행자가 아니다. 이곳에서 살아가고, 느끼고, 배워가는 생활자다. 언젠가 진짜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이 온다면, 나는 분명히 말할 것이다. 하노이는 나에게 제3의 고향이었다고. 그리고 그때쯤이면 나는 또 어디선가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내 삶에는 점점 더 많은 고향이 생기고 있다. 떠나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